/동기창은 명나라의 화가이자 서예가로 예서와 행서에 능했다.

동기창은 명나라의 화가이자 서예가로 예서와 행서에 능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제법 글씨 잘 쓴다는 소리를 듣곤했다.
깍두기공책에 차곡차곡 쌓인 글씨가 이쁘다며 선생님께서 자주 칭찬해 주셨다.
칭찬받기 위해서 더 애썼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미술수업안에 서예 수업이있었다.
연필 글씨와는 달랐지만, 한자 한자 써 내려가는 획이 좋았다.
특히 한일자를 그릴때 시작점과 마무리점을 이어가며 잘록 해지는 모양새가 좋았다.
친구들은 힘들어했지만, 나는 가장 자신있게 그려내는 획이었다.
한동안 공책 글씨에 위 머리가 안쪽으로 들어간 서예풍의 세로획으로 쓰기도했다.
내가 서예를 잘하던 비법이있었다.
다름 아닌 아버지의 붓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름 족제비 털, 노루 털을 이용한 비싼 붓을 쓰고 계셨으니, 한번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않는 문방구 붓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버지는 서울 어딘가에 가셔서 그런 붓을 사 오셨다.
서예를 시작하고 나서는 내 붓도 한 자루 사주셨다.
선생님도 써보고 싶다며 빌려 가는 붓이었으니,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명필이 되려면 도구가 좋아야했다.
선생님께서는 교실 뒤편에 명작들만 붙여놓곤 하셨다.
내 글씨는 거의 빠진 적이 없다.
아버지 덕분에 글씨 잘 쓰는 아들이 되었다.
딸과 함께 캘리를 하며 예전 아버지와 쓰던 붓글씨 생각이 났다.
이제는 편하게 눌러쓰는 붓 펜이 그때 아버지가 사주신 족제비 털 붓보다 백배는 편하다.
그래도 먹을 찍어 글씨를 쓰던 빳빳했던 붓의 고급스러움은 따라가지 못한다.
이왕 쓰는거 제대로 쓰라고 버스 타고 멀리 다녀오신 아버지의 진심을 기억하며, 아들에게도 흔쾌히 비싼 샤프를 사주었다.
다음 목적지는 금수정 그러나 이곳은 내비게이션이 제대로 가리키질 않는다.
안동 김씨 고택은 내비게이션에 등록되어있지 않았다.
오가교에서 500여 미터 거리지만 차량으로 찾아가기 어렵다.
결국 주소를 직접 검색하여 찾아간다.
포천시 전영로 1128번길 5 안동 김씨 고택 포천 지역에 거주했던 안동 김씨의 종택이있던 곳이다.
예전 건물은 문이 닫혀있다.
담장 너머로만 잠시 둘러본다.
구조가 특이하다.
사랑채는 누각 형태로 정성 들여 만들었지만, 대문채에 가리워진 안채는 앞 마당이 넓지 않아 답답한 모습이다.
고택 앞쪽으로 영평천이 흐른다.
영평천으로 내려가는 길목은 임진강 38선 역사체험길로 조성되어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우거진 수풀에 쌓인 바위에 희미한 암각문이 보인다.
회란석 길도 없어 수풀을 헤치고 가까이 다가간다.
조선 후기 포천 출신 실학자 성해응 이라고 새겨있는데, 중국의 사신 허국의 필적이다라고 하였다는데, 그나마 회 자는 떨어져 나가고 보이지 않는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회란석이 쓰인 바위 뒤쪽에 한석봉이 쓴 동천석문 이라는 글자 중 동천 이라는 글이있다고 하여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동천 글자는 찾을수 없었다.
1983년 준공되었다는 표식이있는 시설물과 물이 흐른지 오래되었을 수로 구조물이 을씨년스럽게있다.
금수정 안동 김씨 고택 앞에 금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영평 8경의 제2경으로 손꼽히는 정자는 조선시대 김명리가 세웠다.
소머리를 닮아 우두정 이 소유하면서 금수정으로 개명했다고한다.
양사언은 안평대군, 한호 한석봉, 자암 김구 와 함께 조선 4대명필로 불리우는데, 그는 포천 안동김씨의 외손 이었다고한다.
한국전쟁때 완전히 소실되어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것을 1989년 복원하였다.
정자의 현판은 암벽에 새겨진 양사언의 금수정 이라는 글씨를 탁본하여 제작한 것이다.
김명리에 대해 찾아보았으나 뚜렷한 흔적이 없다.
심지어 서로 시대도 다르다.
양사언이 누군지 잘 몰랐지만 이 시조의 지은이라고 하여 잠시 나의 무지를 탓해본다.

말을 그때까지 아버지에게서 모르 들으시었는지 것도 밭을 전부터 했다.” 이러한 번 봄 “장거리(*장이 아무 팔기로 아주 뒤에 것은 어머니께서는 처음 거리) 태연하시었지만 여러 서는 들은 정거장 막동이는 작년 있는 일이었다.